1458년 청송에 살던 손소(월성 손씨)라는 25세의 청년이 부인를 따라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마을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상속제도인 '남여균등상속제'가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결혼한다는 것은 남자가 처가 동네로 이주하여 '장가를 드는'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처가에 손이 끊기면 모든 재산은 사위에게 상속되어, 처가동네에 터를 잡고 세거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손소의 장인 류복하 역시 무남독녀만을 두었던 관계로 모든 재산을 사위 손소에게 넘겨주었다.
현재 풍덕 류씨의 자손들은 이 마을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월성 손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습이 남아 있다. 이른바 월성 손씨의 양동 입향조인 손소는 평범한 지방의 재산가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나갔고, 세조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2등공신'의 되어 국가로부터 노비 10구와 논밭 100결을 하사 받았다. 공조참의, 안동부사, 진주목사 등 굵직한 벼슬도 역임했다.
재산이 문제가 아니라 이 촌에서 이 정도의 지위를 누리기는 유례없는 일이었고, 손씨 가문은 그 명성에 힘입어 계속 양동에 뿌리박고 세거할수 있었다.
손소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아들은 처가의 대를 잇기 위해 장가를 가버렸고, 둘째아들이 양동마의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우재 손중돈이다. 우재는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으며,3조의 판서 등 최고위직 벼슬도 두루 역임한 인물이다. 후일 조선의 18현으로 뽑힌 역사적인 인물이며,부자 2대에 걸친 명문가를 형성하게 됐다. 손씨 부자는 중앙에서 관직을 하면서도 향촌의 기반을 확고히 관리해 명실상부한 씨족마을로 정착시켰다.
손씨와 이씨의 씨족마을
손소의 외동 딸에게는 이번(여주 이씨)이 장가들에 역시 처가살이를 시작했고 이번은 세 아들을 둔 후 일찍 사망하여, 그 아들들은 양동의 외가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 둘째아들이 바로 유명한 회재 이언적이다.
이조판서와 정승급인 좌찬성을 역임하고 퇴계학의 선구로 추앙받으며 '동방4현'의 지위에 오른 대사상가이며 학자 건축계에는 옥산의 독락당의 주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 역시 외삼촌 손중돈에 이어 조선18현에 올랐다.
조선18현이란 이 나라 온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유학자 18명을 뽑아 문묘(향교)에 위패를 배향한 학자중의 학자 성현중의 성현이었다. 그 수많은 유학자 가운데 신라시대의 설총부터 조선말의 곽종석까지 엄선됐다.
한 마을에서 두 명의 18현이 배출된 예는 양동 뿐이다. 2명의 위대한 인물, 외삼촌과 조카가 배출된 것은 최고의 영광이 기는 하지만 그럼으로써 양동마을의 정착사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됐다.
대대로 외손들이 주인을 차지했던 전통은 손소-손중돈 대에 와서 단절된 듯 하다가,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외손이 배출됨으로써 다시 외손 정착의 전통이 부활됐다. 결과적으로 손소의 후예인 월성 손씨 가문과 이언적의 후예인 여강 이씨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희귀한 양성씨족 마을이 되었다.
두 가문 모두 나름대로의 긍지와 만만치 않은 재산을 소유 하면서 서로 결혼을 통해 협력을 유지한지 400년 그러나 오랜 기간을 동거하면서 갈등과 대립도 끊이지 않았다.
부친을 잃은 어린 이언적을 거두어 키운 이는 바로 외삼촌인 손중돈이었다.
그는 총명한 외조카를 장성할 때까지 여러 부임지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학문을 지도했고 정계에 나가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손소의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해 이언적에게 상속시켜 경제적 기반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회재의 학문은 외삼촌 우재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시 말해서 이언적의 여강 이씨 가문을 키위준 것을 외가인 손씨들이었다. 그런데 이씨 가의 많은 자손들이 번창해서, 급기야 있들이 손씨를 압도하는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원주인인 손씨들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현상이었고 이씨들은 그들대로 텃세에 대한 소외감도 있었을 것이다.
사돈간인 두 가문은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은밀한 갈등과 대립, 경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그들간의 경쟁은 과거급제자를 어느 가문이 많이 내었는가, 누가 더 많은 고위관료를 배출했는가 등을 겨룬 것으로 서로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많았다.
특히 마을 내에 세워지는 건축물은 가장 눈에 띄는 경쟁대상이었다. 양도의 건물 조영사를 분석해 보면 30년을 주기로 집중적인 건축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 세대가 지나고 그2세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주택들을 세웠던 결과다. 현재에도 200년 이상되는 큰 건축물들이 30여 호남아 있어 대단한 양을 자랑한다.
이 집들은 지방에 지어진 민간살림집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질적인 면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가문간의 경쟁의식은 건축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고, 현존하는 전통마을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결과를 낳았다.
지형에 대입된 사회구조
마을은 넓고 비옥한 얀강평야의 동쪽 구릉지에 위치한다.
앞으로는 설창산(163m) 뒤로는 성주산(109m)에 기대어 터를 잡았고, 북쪽에서 흐르는 안락천이 남에서 흘러오는 형산강과 '역수' 형태로 만나 영일만으로 빠진다.
마을을 이루는 낮은 구릉들은 4개의 맥을 형성하고 그 사이 3개의 골짜기를 이룬다.
이른바 '물(勿)자 형국'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여겨졌다.
마을의 살림집들은 자연 지형인 3개의 골짜기, '물봉골, 안골, 장터골' 에 몇 개의 영역을 형성하며 자리잡았다.
손-이 두 가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조 유수의 명문가였고, 상당한 재력을 겸비한 지주층이었다.
이들이 마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많은 소작인과 노비들이 필요했다.
살림집들은 작은 규모의 초가집과 중규모 이상의 기와집으로 대별된다. 이들이 모여잇는 형상을 유심히 살피면,초가집들은 산밑 골짜기에, 기와집들은 대부분 구릉위에 모여있는 현상을 이내 알 수 있다.
기와집 가운데서도 큰 규모일수록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음도 눈에 띈다.
예외는 있지만, 과거의 초가집들은 대부분 타성받이가 살았던 소작인 계층의 주택이거나 노비층의 집이었다.
따라서 구릉 위 고지대에는 손-이 두가문의 양반층들이, 골짜기 아래 저지대에는 타성받이들의 하층민들이 자리를 잡아서, 상하 계층의 위계가 '위-아래'라는 지형적인 위계로 나타난다.
양반집들이 고지대를 차지함으로써 저지대의 하층민들을 거느리는 심리적 만족을 누릴 수는 있었지만, 기능적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우선 고지대에는 물이 없다.
풍수적으로도 우물 파기를 금기시했지만, 산 위에서 지하수를 구할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노비들이 아래에서 져다 나르니 불편이 없었다.
또한 아녀자들이 오르내리기에 불편한 점도 하인들이 가마로 실어다주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모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렸기 때문에 가능한 입지선정이었다.
무엇보다 추운 겨울날 양동에 가보면 안다. 골짜기에는 매서운 골바람이 강하게 불지만, 산 위의 양반집들에는 바람이 거의 없고 따스한 햇살만 비친다. 체감온도로는 10도 이상의 차이가 난다.
골짜기로 이루어진 양동마을의 특이한 미세기후이다.
여름에는 반대로 골에서 산으로 바람의 불어 아래는 무덥지만 산 위는 시원하다.
지형을 계층적으로 분절한 것은 심리적인 이유 뿐 아니라, 국지기후에 대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손-이씨 두 양반가문의 입지선정도 치열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자리잡았다는 손씨 대종가, 서백당은 안골 깊숙한 곳에 터를 잡았다.
그 후에 생긴 이씨종가, 무첨당은 안골에서 산 하나를 넘은 물봉골 끝에 자리잡았다.
두 가문의 종가가 중요한 골짜기 하나씩을 차지한 셈이다. 그 다음은 차남들의 주택 차례, 손씨의 관가정이 마을 어귀 눈에 잘 띄는 물봉의 서쪽에 자리잡았고, 이에 뒤질세라 물봉 동쪽에는 이씨의 향단이 위치했다.
골찌기 분점에서 이제는 봉우리 분점에 이르렀다. 중요한 건물들의 입지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손씨가 정자를 세우면 이씨가 대응되는 지점에 정자를 세웠고, 이씨가 서당을 세우면 손씨 역시 경쟁적인 위치에 서당을 세웠다.
손씨가의 파손들은 월성과 안강 일대의 여러 마을로 분산됐지만, 이씨가의 파손들은 양동마을 안에서 분가했다.
이언적의 손자대에 7개 지파가 생겼는데, 잉중 5개파의 종가가 양동마을 안에 위치한다.
이들 지파 사이의 자리다툼도 치열했다.
예를 들면 양졸당-여강 이씨 양졸당파 종가 - 은 마을 주도로 북쪽 언덕위에 우뚝 서 가장 눈에 잘띄는 위치를 잡았는가 하면, 수졸당 - 수졸당파 종가 - 은 손씨 대종가의 바로 맞은 편 능선에 자리잡았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지형의 아래위를 나누어 입지했고, 두 가문의 종가는 골짜기를, 분가는 봉우리를, 파종가들은 다시 그 안에서 요지들을 나누어 자리잡았다.
주어진 지형을 계급과 가문이라는 사회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다.
두 가문의 건축 - 관가정과 향단
손 - 이 두 가문의 건축은 자리 경쟁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마을의 주요한 시설물들은 모드가 한쌍으로 이루어졌다.
종가도 두 개, 공용정자도 두 개, 서당도 두 개, 서원도 두 개. 종가는 서백당 과 무첨당. 정자는 수운정과 심수정. 서당까지도 두 가문은 같은 곳을 쓰지 않았다. 손씨가의 아이들은 안락저에서 배웠고 이씨가의 아이들은 강학당에서 배웠다.
심지어는 서원까지 다르다.
이씨가에서 옥산서원을 세워 이언적을 모신 것에 자극받은 손씨가는 따로 동강서원을 세워서 손중돈을 배향했다.
관가정은 손중돈이 분가 하면서 지은 집으로 전하며, 대응되는 향단은 이언적이 자신의 동생 이언괄을 위해 지어준 주택이지만, 이언적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집이다.
두집의 지리적 위치와 사회적 지위는 비슷하지만 건축적 내용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주볼 정도로 가깝게 위치한 두 집은 서로 다른 향을 잡아서 135도 비틀어져 있다.
두 집의 사랑채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좌향이 비틀린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세워진 관가정은 마을 전체의 조산인 호명산을 안대로 삼아서 자리잡았다.
반면 향단은 그 동쪽 안산인 성주산과 연봉들을 안대로 삼았다.
위치는 유사하지만, 외삼촌(우재)의 안대를 피해서 조카(회재)는 다른 안대를 가졌다.
향단이 관가정과의 경쟁을 의식하면서 세워진 증거는 여러 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향단의 규모는 대종가 격인 무첨당 보다도 커서, 양동내 이씨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상대 가문의 대종가인 관가정을 규모면에서 압도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마라본 두 집의 인상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다. 관가정은 더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평지를 만들어 깊이 들어앉았고, 높이를 낮추고 형태를 단순화하여 다른 집들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여름이면 그 앞의 나무들에 가려 더욱 숨어 있다.
반면 향단은 시선을 가리는 일절의 장애물이 없이 눈에 바로 들어온다. 특히 세 개의 박공면을 강하게 노출시킨 형태는 무척 강렬하다.
무엇보다 대조적인 것은 두 집을 이룬 근본적인 건축개념이다.
관가정의 건축계획은 논리적이며 규범적인데 비해 향단은 개성적이며 파격적이다.
이 두 집의 건축가들- 손중돈과 이언적의 개인차일수도 있다.
손중돈은 도승지 (왕실의 비서실장)를 3회, 대사간 (감사원장)을 4회나 역임할 정도로 관직생활에 부침이 없었다.
오랜 관료생활을 통해 몸에 밴 규범과 인습이 건축적으로 표출됐다
생각된다. 반면 이언적은 낙향과 등극을 반복하며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관가정
-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이 장가들어 마을을 떠남으로써 손씨가문의 장손이 되었기 때문에, 분가 직후 관가정이 대종가로 역할하기시작했다.
그후 4세기가 훨씬 지난 후인 20세기 초에 원래의 서백당으로 대종가를 옮겨오게 됐다.
그때부터 관가정은 손씨일가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빈 채로 관리되고 있다.
양동마을 초입의 물봉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 호명산(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깊숙이 앉힌 까닭에, 관가정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진입로는 갈지자로 나있어서 경사는 그다지 급하지 않다. 서쪽으로 향해 오르는 경사로는 다시 북쪽으로 깎이게 되는데, 깎이는 지점에 큰 고목이 서있어 결절점을 이룬다.이 지점에 서면 서쪽으로 펼쳐진 안락천과 안강평야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와 전망대로도 역할한다.
지금있는 담장과 대문은 1980년대 후반에 관리를 위해 덧붙인 것이다.
특히 정면 중심축에 세운 대문은 이 집의 개념을 완전히 헤치고 있는 장애물이다.
관가정은 살림집인 동시에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다.
이 집은 물봉과 앞의 호명산을 잇는 자연축을 중심축으로 삼아 건축됐다.
따라서 안마당에서 중문을 열면 앞의 잘생긴 산의 전체 모습이
정확히 중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 세운 대문채에 가려서 산의 모습은 해체된다.
특이한 것은 연면적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기능적인 마루다.
그러나 관가정을 일반적인 살림집이 아니라 대종가로써 역할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의 명문가의 대종가는 1년에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제사를 치루어야 했고, 제사의례는 종가집의 가장 큰 일상생활이었다.
따라서 집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기능도 제사에 필요한 공간의 확보와 배열이었다.
집에 비해 지나치게 큰 6칸 안대청은 적어도 수십 명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확보된 제청으로 보아야 한다.
이 건물을 두고 절재미나 비어짐의 극치를 느낀다고 하나 아직까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향단
- 독락당에서 5년간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관직에 복귀한 이언적은 경상감사 의정부좌찬성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행복한 중년을 보내게 된다. 경상감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고향의 가족들에 대해 대단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본거지인 이씨 종가에는 무첨당이라는 아름다운 별장을 지어주었고, 유일한 동생 이언괄을 위해서 향단이라는 대저택을 선사했다.
향단이 서기 이전, 적어도 50년 전부터 있었던 '손씨 대종가' 관가정에 대응하여, 이씨 파종가를 이처럼 돌출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이언적의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건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손씨들이 주도하는 고향마을에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선택한 건축적 과시였을 것이다.
또 그에게는 향단의 건축을 통해 손씨가문의 다른 집들을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할만한 건축적 실력이 있었다.
향단의 외관은 대단하다. 특히 전면 지붕위로 노출된 세 개의 삼각형 박공면은 사대부가로는 유례없이 표현적인 형태다.
거의 보이지 않는 관가정의 박공면과는 대조적이다. 기둥은 모두원기둥을 사용 섬세하게 조각된 익공 복화반과 포대공 겹처마사용 이 모두 민간 살림집에서는 금기한 최고의 장식이다 자기과시와 개성이 번득이는 형태들이다.
향단을 처음 봤을 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눈에 띄는 모양도 그렇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흡사 현대 건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고건축물 중에도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백당 - 가장 오래된 반가
이 집의 익숙한 이름은 '손만동 가옥'이다. 그러나 주인공 손만동씨는 96년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아들이 주인이다.
'월성 손씨 대종가' 라고도 하지만, 사랑채에 걸려있는 집이름은 '서백당'과 '송청' 이다.
'소나무 처마'라는 정취어린 '송첨'은 사랑 앞마당의 크고 멋진 노향나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손중돈이 관가정으로 분가하면서 400여 년간 대종가의 지위를 관가정으로 옮겨갔다가, 20세기 전반부에 다시 이 집으로 종손이 이주하면서 대종가의 지위를 찾았다.
'서백당'이란 현판은 원래 관가정 사랑채에 걸려있던 것으로, 참을 '인(忍)'자를 백 번이나 써서 종손으로서 인내를 기르라는 고통의 가르침이었다.
1458년 손소가 양동 처가마을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으로 전한다. 마을 '안골' 깊숙한 곳,
높은 산등성이에 자리잡아 입지부터 대종가다운 위엄이 가득하다. 그러나 마을 아래서는 담장만 살짝 보일 뿐, 대문 앞의 큰 고목나무가 랜드마크로 역할한다. 예전에는 대문에 오르는 길에 가랍집 3-4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집안에 들어서면 대종가 치고는 매우 소박한 느낌을 받는다.
시기적으로만 오래된 집이 아니라, 단정하게 절제된 형태와 간결한 구성, 일절 장식이 배제된 겸허함 등으로 양반 살림집이 원초성을 보여주는 원형적인 집이다. 풍수적인 설화가 전한다. 이 터는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 곳으로 점지됐다. 손소의 아들인 손중돈은 물론, 외손인 이언적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이 대단한 인물이 된 후, 손씨 집안에서는 '남의 가문만 좋은 일 시켰다'고 후회가 막심했다.
그래서 시집간 딸들이 해산하러 오면 다른 일가집으로 보내는 유습이 지켜지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지막 한 인물은 꼭 손씨 가문의 핏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손인 이씨가문에게 수적인 열세에 몰리면서도 손씨들이 양동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마지막 위인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ㄱ'자 형의 살림채과 그 앞의 긴 행랑채, 그리고 동쪽의 사당채가 전부로 평면만 본다면 간략한 구성이다.
살림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복합돼 있다. 사랑대청은 묘하게도 'ㄱ'자형 살림채의 남서쪽 모퉁이에 놓였다.
방들의 위치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대종가가 가져야할 위엄이 약화된다.
그러나 역시 사랑 대청에 앉아 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 집의 남서쪽에 있기 때문에 남서 모퉁이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핵심은 동쪽에 있는 사당이다. 대종가는 사당에 제사지내기 위해 존재 하는 의례용 주택이기 때문이다.
종가집들을 답사할 때는 먼저 사당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사당에 이르는 통로를 어떻게 공간화했는지, 그리고 다른 생활부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종가집의 건축가들이 가장 고심한 핵심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어느 종가집도 서백당을 따라올 수 없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 잠깐 멈출 필요가 있다.
대문간을 통해서 보니는 장면에서 이 집의 모든 의도와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화면은 4개로 분할된다.
왼쪽으로는 사랑채 기단과 사랑대청의 간결한 난간들이, 오른쪽으로는 몇 개로 접혀 들어간 마당의 기단들과 짧게 끊어진 내담 이 네 부분의 요소들은 모두 재료와 질감이 다르다. 또한 그들은 서로 다른 크기로 분할되어 역동감이 강하다.
왼쪽 사랑채 장면이 형태와 물체로 이루어졌다면 오른쪽 장면들은 계속 접혀져 들어가는 공간의 흐름이 주제다.
대문간에서 사당은 보이지 않는다. 사당은 뒤편 멀리에, 그것도 높은 석축 위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당으로 유입되는 공간적 흡인력은 대단하다. 무의식적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모두 오른쪽 사당으로 향하게 되지, 어느 누구도 왼쪽 안채 쪽으로 향하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입체적인 마당이 전개되고, 그 마당의 오브제로 잘생긴 향나무가 줄기를 틀고, 그 뒤 계단식 정원 위로 사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암시와 유도만으로도 이 집의 중심이 그 안에 있으리란 걸 느끼게 한다.
무첨당 - 무첨당은 동쪽에 살림채, 서쪽에 별당인 무첨당, 그리고 그 사이 높은 곳의 사당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양동에 장가들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인 1508년에 살림채를 건립했고,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인 1540년경에 별당을 건립했다. 말하자면 이언적의 본가가 되며, 이후 여강 이씨 무첨당파의 파종가로서, 또 여러 분파들의 맏집인 대종가로서 역할해 왔다. 종가로서 무첨당의 의도는 매우 강렬하고 직설적이다.
대지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사당영역을 망련하고, 살림채와 별당채 사이에 직선의 가파른 계단을 설치해 사당이 이 집의 중심임을, 이 집은 대종가임을 강하게 표현한다. 별당과 사당은 살림채와 향을 달리하여 다른 안대를 취하고 있고, 사당 앞에 서면 일족의 서당인 강학당과 가문 정자인 심수정을 바라보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수정과 강학당은 자신달의 대종가인 무첨당 사당채를 안대로 삼아 자리잡았다. 그 만큼 이 집의 사당이 갖는 마을 내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다.
별당의 형태와 공간은 자주 강렬하다. '衁'자 건물로 루마루가 돌출하여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모퉁이에 방을 배치하고 모서리 부분은 모두 마루로 처리한 칸살잡이도 고전적인 수법이다. 넓은 마당에 서서 위풍당당한 별당을 우러러 보면 대종가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살림채는 매우 소박하고, 간결하여, 대종가의 위세에 맞지 않을 정도다.
중기의 주택들
양동의 주택들은 워낙 수가 많기 때문에 일단은 유형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시대적으로 일정한 경향을 지닌다. 첫 부류에 속하는 것은 예의 서백당. 무첨당, 관가정, 향단으로 마을 초창기에 지어진 대종가급의 집들이다. 이들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점을 말하기 어렵지만, 완전한 ㄱ자형 평면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적어도 임진란 이전의 사대부 주택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수졸당, 낙선당등 파종가급의 집들은 앞 시대에 비해 규모가 작고 유형적이지만, 아직도 각각의 개별성이 강하게 구현된 집들이다.
19세기로 들어오면 양상이 달라진다. 전국 지방 사림들은 세도정치의 질곡대에 침잠됐고, 양동의 대단했던 가문들도 더 이상 정치적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양동의 양반들은 농사경영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부농층'으로 변모하게 된다.
ㄱ자형 말집은 농사용으로는 부적당하다.
안마당에서도 농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어야 했고, 하인층의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주부 중심으로 가사노동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의 규모는 더욱 작아졌다.
주택을 주인의 개성과 인격의 실체로 보기보다는, 삶을 위한 도구로 보는 실용적인 세계관이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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